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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장

① 염장의 의의 염장이란 음식을 소금에 절이는 것을 말하며, 인류의 조상들이 오래전부터 사용해 온 식품 저장 방법 중 하나이다. 최근에는 냉동, 냉장, 통조림 등과 같은 더 발전된 저장 방법이 널리 보급되고 발전함에 따라 염장 식품의 생산량이 점차 줄고 있으나, 우리나라의 현실에서는 여전히 제주에서 만들어지는 가공품 가운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만든 어류 염장 식품(특히 고등어)은 일제강점기 말 무렵 중국 대륙과 만주·몽골의 깊숙한 지역까지 널리 퍼지며 매우 큰 인기를 끌었던 수출 품목이었다. 그 이유는 가난한 사람들이 동물에서 나오는 단백질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귀하고 비싼 소금을 비교적 쉽게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되었기 때문이다. 소금은 다른 식품 방부제들과 비교할 ..

한국의 전통&민속 배

① 배의 역사 배는 한자로는 배 선(船), 큰 배 박(舶), 작은 배 정(艇) 등으로 나타내는데, '선'과 '박'은 큰 배[ship]를, '주'와 '정'은 작은 배[boat]를 뜻하며, 영어에서는 이들을 모두 포함하는 ‘배’라는 총칭어로 'vessel'이라 한다. 태고 시대의 원시인들은 들과 산을 헤매다가 강이나 호수, 바다와 마주쳤을 때, 이를 어떻게 건널 것인가를 두고 깊이 고민했을 것이다. 밑바닥을 걸어 건널 것인가, 헤엄쳐 갈 것인가, 아니면 수십 리, 수백 리를 돌아갈 것인가 하고. 그렇게 해서 물에 잘 뜨는 통나무를 사용했을 것이며, 통나무보다 안정적인 뗏목을, 뗏목보다 빠르고 잘 뜨는 통나무배[통나무의 속을 파낸 것]를, 통나무배보다는 물건을 더 많이 실을 수 있고 안전한 구조의 나무배로 ..

한국 전통 미역 양식

미역 [Undaria pinnatifida(Harvey) Suringar]은 김, 다시마와 함께 예로부터 우리 민족이 즐겨 먹어 온 해조류로서, 옛 문헌에는 ‘관’, ‘감관(단맛이 나는 관)’, ‘해대(바다 띠)’ 등으로 적혀 있다. 미역은 한국과 일본에만 나는 특산물로, 제주도를 비롯해 우리나라 전 해안의 암초 지역에 분포한다(단, 서해안은 황해도 이남 지역에 한정된다). 1958년경부터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투석식(돌을 이용한) 양식이 활발히 이루어지다가, 1967년경부터는 인공적으로 포자를 붙이는 방식의 탱크 내 육묘(어린 미역을 기르는 일)가 기업화되면서, 미역의 수하식 양식(줄에 매달아 바다에 띄우는 방식)이 크게 확산되기 시작하였다.ㄱ. 종류와 생태 미역은 갈조류에 속하는 해조류로, 한..

한국 전통 김 양식

우리 민족이 김을 이용한 역사는 오래된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 고전에는 김을 '자채(자색 해초), 해의(바다의 옷), 해태(바다의 기름)' 등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성종 12년(1481)에 편찬되어 중종 25년(1530)에 정정 증보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토산조에는 39곳의 해태 산지가 기록되어 있고, 부분적으로는 이보다 이전의 지리서인 『경상도 지리지』(1424~25), 『세종실록지리지』(1454) 등의 토산공물조에 '해의(바다의 옷)'라는 이름이 나온다. 위의 기록은 김을 말한 것인지, 김 제품을 말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이미 500년 전부터 김을 식용으로 이용해 왔다는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보다 김 양식이 앞선 일본인들도 섶을 이용한 양식법은 80년, 수평식 발을 이용한 양식법은..

한국 민속 어류 양식

① 잉어 양식 잉어[Cyprinus Carpio L.]는 오래전부터 인류와 밀접하게 관계를 맺어 온 물고기로, 양식의 역사도 길다. 독일, 오스트리아 등지에서 양식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으며, 동양에서는 중국을 비롯해 일본, 인도네시아, 태국, 미얀마, 인도 등 주로 열대 지역에서 양식되고 있다. 특히 중국에서는 기원전 500년경에 도주공(陶朱公)이 『양어경(養魚經)』이라는 책을 저술하여 잉어의 양식법을 논했으며, 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양어 관련 서적이라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1세기 초에 잉어를 기른 기록이 남아 있다. 이 기록을 통해 성 안에 못을 파고 잉어를 기른 사실을 알 수 있으며, 기르는 목적과 방법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우리나라에서 물고기를 기른 첫 번째 기록으로 간주된..

한국의 전통 수산 문화 (꽃게 양식)

우리 나라 근해에서 많이 잡히고 있는 꽃게(Neptunus trituberculatus MIERS)의 분포는 중국 연안에서 일본의 진경 해협까지 이른다. 꽃게는 천해의 사니(진흙) 지역에 살지만, 유영을 잘하여 이동력이 크다. 보통 밝은 낮에는 사니 속에 묻혀 있으며, 밤이 되면 일몰 후부터 활동을 시작하여 먹이를 찾는다. 먹이는 작은 고둥무리, 조래무리, 다모충류, 소갑각류 등이 있다. 겨울 동안은 깊은 곳이나 외해(바다의 바깥쪽)로 이동하며, 봄부터 여름까지는 얕은 곳이나 내만(바다의 안쪽)으로 이동한다. 수온이 15~14℃로 내려가면 사니 속에 묻혀 동면에 들어간다. 동면 전에 늦가을에는 이동하지 않는다. 성장이 잘 되는 수온은 20℃ 이상이며, 산란기는 4월 하순부터 10월 중순까지이고, 이 기..

한국 전통 수산 문화 (조개 양식)

① 백합무리의 양식 조상들은 석기시대 때부터 조개를 많이 이용해 왔다. 그 이유는 조개의 살이 맛있고, 껍질이 두텁고 단단할 뿐만 아니라 매끄럽고 크기도 비교적 커서 국자나 식기 등 여러 가지 기물로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백합은 널리 이용되는 패류 중 하나로, 그 살은 단백질이 풍부하여 고급 영양식품으로 사용된다. 패각은 백색 바둑알을 만드는 데 쓰일 뿐만 아니라 각종 장식용 물건이나 약물의 용기로도 활용된다. 특히 일본에서는 전국시대부터 상류사회 여성들의 정조관념을 강조하기 위해 여성들의 제짝 맞추기 노리개로 많이 사용되었는데, 백합의 껍질은 다른 조개껍질과 달리 내부의 구치(겉모습)가 개체마다 다르기 때문에 제짝이 맞지 않으면 쓸 수 없기 때문이다. 백합의 영어명은 'hard cl..

한국 전통 수산 문화(채취)

1. 굴 따기 굴은 우리 민족이 옛날부터 식용으로 많이 이용해 왔다. 그 증거로는 각 지방에서 발굴되는 패총(조개껍질 무덤)에서 알 수 있다. 우리나라 해안 근처에서 발굴되는 패총은 대부분 굴껍질과 백합껍질로 이루어져 있다. 일제 시대, 경도제국대학에서 발굴한 김해패총의 경우, 이 대학 이학부 조수인 쿠로다 토쿠메(흑田덕미)의 감정 결과, 패류 34종(담수산패류 5종 포함)과 갑각류 5종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중 대부분이 굴과 백합껍질이었고, 굴은 참굴로 길이가 약 1척(약 30cm), 백합은 직경이 4촌(약 12cm) 이상 되는 대형이었다고 한다. 옛 기록에는 굴을 모려(牡蠣), 여방(蠣房), 여합(蠣蛤), 모합(牡蛤), 호(呼), 고분(古賁), 석화(石花)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기록하고 있다..

한국의 전통 농경 문화

우리 나라는 동해 근처 북쪽에서 남쪽으로 태백산맥이 뻗어 있고, 서쪽으로 흐르는 작은 산들 사이에는 좁지만 비옥한 평야가 펼쳐져 있어 일찍부터 농업이 발전했다. 지리적으로 온대 지역에 속하며 기후는 대륙성 기후를 보인다. 이로 인해 풍토도 매우 다양하다. 좁은 이 땅에 열대나 온대식물은 물론, 지중해성 식물과 사바나 식물까지 합해 300여 종이 재배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자연적인 혜택 덕분이다. 우리 농업의 역사는 아주 오래되었다. 신석기 시대 후기에 조와 피가 생산되었고, 청동기 시대 초기에 벼농사가 시작되었으며, 이후 기장, 수수, 콩, 팥 등이 재배되었다. 특히 벼농사는 우리나라 남부 지역에서 김해 시대에 이르러 일반화되었다. 삼국 초기부터 벼농사의 중요성은 크게 인식되었으며, 『삼국사기』의 신라..

민속 가구 소개 (빗접과 궤경대, 상 & 탑과 의자, 궤)

1. 빗접과 궤경대(櫃鏡臺) 빗접은 퇴발낭(머리카락을 받기 위해 사용하는 사방 80~90cm 크기의 천), 빗, 빗솔, 빗치개 등을 보관하는 제구로, 유리거울이 나오기 이전에 사용되었다. 궤경대(경대)는 좌경 또는 경대라고도 하며, 유리거울이 보급된 이후 빗접에 거울을 부착한 것으로, 빗의 발전된 형태라 할 수 있다. 빗접은 소함(梳函)이라고도 불리며, 주칠(붉은색 칠)과 나전칠기 제품이 많은 편이다. 세종 임금 때에도 나전 소함이 제작되었다. 남성용은 매우 작지만, 여성용은 대개 3단 서랍이나 2단 서랍과 1단 칸으로 구성된 두 가지 양식이 있다. 잠금장치가 있는 것으로 보아 값비싼 수식품도 보관할 수 있었다고 여겨진다. 조선시대 나전 빗접은 중국과의 중요한 교역품이었다는 사실은 『지봉유설』에 기록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