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 놀이 : 타구악(打球樂)
포구악(抛毬樂), 또는 타구악이라고도 불리는 이 악은 타구를 모방하여 음악에 맞춰 놀이를 진행하는 특징이 있다. 타구는 그 형식이 여러 가지로 이루어져 있어 제대로 행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고려의 타구악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 악지(樂志)에 등장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문종 27년 11월 신해일(辛亥日) 팔관회를 열 때, 왕은 신봉루(神鳳樓)에 나가 음악을 감상하였다. 교방(坊)의 여제자 초영(楚)이 처음으로 포구락(抛毬)과 구장기(九張機)를 별기(別伎)로 전했다. 이 때 포구락(抛毬樂)에는 제자 13명, 구장기(張)에는 제자 10명이 각각 선정되었다.”
이 시기는 송나라에서 대성악(大晟樂)을 고려로 보내던 때로, 송나라의 새로운 대성악과 함께 포구악이 전해졌다고 한다. 당시 송나라에서 들어온 악기들에는 방향(쇠 16), 퉁소(구멍 8), 피리(구멍 9), 비파(줄 4), 아쟁(줄 7), 대쟁(줄 15), 장구, 교방고, 박(6줄기)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악기들을 사용하여 포구악을 시작했으며, 놀이가 시작되면 우선 무용수들이 검은 옷을 입고 붉은 옷을 덧입은 뒤, 악관과 단장한 기녀들을 데리고 동남쪽에 서서 들어와 앉았다. 이후, 절화(折花)를 연주하며 두 기녀는 대나무 장대를 받쳐서 앞에 세운다. 음악이 끝나면 노래를 부르는데, 이 노래는 태평성세를 찬양하는 내용이다. 노래가 끝나면 좌우로 나뉘어 시립하고, 악관들이 다시 절화를 연주한다. 그 후, 기녀 12명을 좌우로 나누어 세우고, 이들이 한 번에 6명씩 나와 춤을 추게 한다. 춤이 끝난 후, 기녀들은 대나무 장대 뒤로 들어가 4대로 나누어 시립한다. 음악이 끝나면 다시 절화를 3번 창하게 된다. 창이 끝나면 악관이 다시 절화를 연주하며, 기녀 두 사람은 마주보며 춤을 춘다. 춤을 추는 기녀들은 앞으로 나아가 화병(花甁) 앞에서 절화 모양을 하며 춤추고, 다시 물러난다. 그 후 악관은 수룡음(水龍吟)을 연주하고, 두 대의 기녀 12명이 돌면서 춤을 춘다. 다시 수룡음을 연주하면서 ‘동천경색(洞天景色)’의 사(詞)를 부른다. 그 후 악관들은 소포구악을 창하며, 왼쪽 대에 있는 기녀 6명을 춤추게 한다. 이들은 서로 마주보며 일제히 서고, 음악이 끝난 후 전원이 소포구악을 제창한다. 가사가 끝나면 한 사람이 격구의 문 앞에서 창을 하며, 창이 끝나면 공을 던져 격구의 문으로 공이 정확히 들어가면 전원이 절을 하고 춤을 춘다. 마지막으로 12명의 기녀는 일제히 춤을 추며 격구의 문을 나가면서 타구악이 끝난다. 이때 기녀들은 여러 차례 춤을 추어 관객들을 즐겁게 했다.
이처럼 포구악은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기 위한 선행 행사로, 기녀들이 음악에 맞춰 장시간 놀게 된다. 그러나 원래 타구는 공을 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고, 일정한 거리를 재서 격구의 문으로 공을 지나가게 하며 기량을 겨뤘다. 처음에는 말을 타고 호협한 무사들이 기량을 발휘했으나, 기량이 떨어지는 무사들은 점차 도태되었다. 이러한 놀이에서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에, 고려 말기에는 점점 사라져 갔다.
이성계는 뛰어난 무사로서 타구에서도 비범한 자질을 자랑했다고 한다. 태종 이후 숭문정책에 의해 타구의 기량은 점차 떨어지기 시작했으며, 세종 때 잠시 장려되었지만 결국 대세를 돌이킬 수 없었다. 그리하여 타구는 아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일종의 필드하키나 기마하키와 비슷한 전통적인 경기가 부활되지 못하고 사라진 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