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민속 문화

쌍육(雙六)

solid-info 2025. 4. 21. 18:07

쌍육(雙六)

 

 

 쌍육은 놀이의 한 종류로, 박희(즐겁게 노는 놀이)의 하나이며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다. 『오잡저(다섯 꿩 누이 이야기)』에 따르면, 원래는 호희(오랑캐들의 놀이)라고 했다. 옛날에 호주의 동생이 죄를 지어 죽을 위기에 처했다. 이때 그 동생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쌍육이라는 놀이를 만들어 호주에게 바쳤다고 전해진다. 쌍육은 말판 위에 돌이 하나만 남게 되면 지게 되고, 돌이 두 개 이상으로 늘어나야 다시 살아날 수 있는데, 이를 본 호주가 감동하여 동생의 목숨을 살려 주었다고 한다.

 

 쌍육에서는 돌이 하나뿐이면 상대의 공격을 받아 지게 되고, 돌이 둘이 되면 '쌍육'이라 하여 이기게 된다. 놀이를 시작할 때는 쌍육판 위에 검은 돌과 흰 돌을 각각 12개씩 놓고, 2개의 주사위를 대나무로 만든 통에 넣어 흔들어 굴린다. 주사위를 던져 나온 눈의 합에 따라 먼저 목표 지점에 도착하는 사람이 승리하게 되어 있다. 홍준이 쓴 『쌍육청(쌍육을 두는 다섯 마당)』에서는 검은 나무로 놀이판을 만들고, 그 판 안에서 여러 조각을 맞추어 가며 쌍육이 되게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처음 당나라에서 이 놀이가 만들어졌을 때는 간단히 12개의 돌을 번갈아 움직여 가며 순서에 따라 승부를 겨뤘고, 마지막에는 모든 돌을 모으는 방식으로 마무리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도 이런 놀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놀이의 구체적인 방법은 알려지지 않았다. 조선시대 초기에 와서는 부녀자들이 주사위를 던져 눈을 맞히는 사람이 차례로 승리하는 식으로 놀았다고 전해진다. 중종 20년(1525년)에 형조판서를 지낸 조계상이 승지 이세정과 가까운 사이가 되어 자주 만났는데, 이들은 이따금 쌍육을 즐겼다. 한번 쌍육을 시작하면 술과 음식을 나누며 밤늦도록 놀았다고 한다.

 

 이규경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오주 지역 여러 기록을 모은 책)』에도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후위 나라 때 이소(이름을 가진 사람이 쓴 글)에 따르면 조식이 '장행국'이라는 놀이판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장행국은 쌍육을 두는 판과 비슷한 것으로, 주사위와 돌이 함께 갖춰져 있었고, 쇠붙이로 이를 이어 맞추며 승패를 가렸다고 한다. 처음에는 장행국을 간단히 즐겼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복잡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주사위를 한 번 던지면 대부분 승패가 빠르게 결정됐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도 가끔 이런 놀이를 즐겼던 것 같지만, 놀이 방법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는 왕을 중심으로 왕족들이 가끔 한자리에 모여 쌍육뿐 아니라 장기, 바둑, 격구(말 타고 공을 치는 놀이) 같은 놀이도 함께 즐겼다. 이런 모임에서는 승자를 뽑아 다양한 상품을 주기도 했다.

 

 중종 때 조계상이 쌍육을 즐기기 위해 자주 한 곳에 드나들며 오래 머무는 모습을 본 누군가가 오해를 하여, 조계상이 분명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몰래 고발해 한바탕 소란이 벌어진 일도 있었다. 이는 쌍육에 얽힌 웃지 못할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이런 사건을 겪은 뒤로 쌍육놀이는 점점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