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민속 문화

활쏘기 2

solid-info 2025. 4. 28. 12:41

활쏘기 2

 

 정조 14년(1790년)에 작성된 수어청(성 안을 지키는 부서)의 활쏘기 대회 기록을 보면, 무사들이 활쏘기는 하지 않고 모여 앉아 떠들면서 시간을 보내기만 한다고 왕이 한탄하고 있다. 왕은 또, 각 군부대에서 활쏘기 대회를 연다고는 하지만 말뿐이라며 안타까워하였다. 이 기록을 보면, 당시 무사들조차 활과 화살을 내버려 두고 무기력에 빠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원래 군부대에서는 활쏘기 대회를 통해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우도록 되어 있었다. 이 활쏘기 규정에서도 각 부대 지휘관들이 활쏘기를 잘하도록 하였는데, 군사들은 한 달에 두 번 활쏘기 연습을 해야 했다. 한 번은 작은 천 조각을 겨냥해 쏘고, 다음 번에는 과녁을 겨냥해 쏘게 하였다. 과녁을 쏠 때는 ‘버들잎 화살’이라고 불리는 정식 화살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훈련함으로써 군사들이 정식 화살을 제대로 다루게 하고, 작은 천 조각을 쏘면서는 궁술을 갈고닦게 하려 한 것이다. 소포(작은 천 조각)를 쏠 때는 일정한 거리를 재어 연습하게 하였다.

 

 나중에는 춘당대(봄 연못 옆 마당)에서 과녁에 화살을 맞힌 수를 기준으로 실력을 평가하여 과거 시험을 치르게 하였는데, 이를 춘당대 무과(무사 시험)라 하였다.

 

 춘당대 무과에 응시하려면 활쏘기 솜씨가 뛰어나야 했지만, 실제로는 활을 잘 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응시자들은 활과 화살을 들고 춘당대 앞에 모여 여러 사람이 함께 한 차례씩 활을 쏘았다. 여기서 '한 차례'란, 한 사람이 화살 다섯 개를 차례차례 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한 개도 과녁에 못 맞히는 사람이 많았다. 이렇게 세 번씩 차례로 활을 쏜 다음 성적을 점검해 보면, 네 발 이상 맞히는 사람이 드물었다고 한다.

 

 그 뒤에도 열 번씩 활을 쏘게 했지만, 네 발 이상 명중시키는 사람은 여전히 거의 없었다. 왕은 이런 실상을 보고 무사들 중에 화살을 네 발 이상 맞히지 못한 사람은 벌을 주라고 명령할 정도였다. 그렇지만 벌을 준다고 해서 궁술이 갑자기 나아질 리 없었다.

 

 결국 누구든지 자유롭게 활쏘기에 참가하게 하고, 그 가운데 활을 잘 쏘는 사람만 뽑아 춘당대 무과에 응시하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각 지방에서도 빈둥거리던 사람들을 모아 무술 훈련을 시키고, 심지어 농민들까지 활쏘기를 배우게 하였다. 그러면서 합격 기준도 완화하여, 한 번에 다섯 개의 화살을 쏘는 동안 한 번이라도 명중하면 인정하고, 다섯 번 시도해서 다섯 번 모두 명중해야 합격하게 하였다.

 

 이 기준에만 합격하면 아무리 농부라도 무사라 불러주었다. 마을에서도 이런 사람들이 모여 활쏘기를 열심히 연습하였는데, 이들을 ‘한량’이라 불렀다.

 

 서울에서는 활쏘기를 연습하는 장소인 사정(射亭) 중 황학정이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순조 7년(1807년)에 작성된 『황학정기』에 따르면, 당시 인왕산 아래에는 백호정이라는 활터가 있었고, 순조 7년에는 풍소정이라는 활터도 있었다.

 

 이밖에 풍소정을 중심으로 필운동에는 등과정, 옥동에는 등룡정, 삼청동에는 운룡정, 사직동에는 대송정이 있었다. 이 다섯 곳을 서촌의 다섯 사정(오정)이라 불렀다. 또 장충단에는 석호정, 마포에는 화수정, 동대문 밖에는 청룡정, 가회동에는 일가정, 천연동에는 서호정 등이 있었다.

 

 이들 사정 가운데는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곳도 있다. 이러한 사정들은 대부분 순조 이후에 세워진 것들이라고 한다. 원래 사정은 국가가 세워준 것이 아니라, 활쏘기를 좋아하는 권력자들이 궁술을 연습하려고 뜻을 모아 세운 것이었다. 이후 이들 유지들이 사라지자,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사정을 지키려 애썼지만, 결국 흐지부지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