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 가구 소개 (빗접과 궤경대, 상 & 탑과 의자, 궤)
1. 빗접과 궤경대(櫃鏡臺)
빗접은 퇴발낭(머리카락을 받기 위해 사용하는 사방 80~90cm 크기의 천), 빗, 빗솔, 빗치개 등을 보관하는 제구로, 유리거울이 나오기 이전에 사용되었다. 궤경대(경대)는 좌경 또는 경대라고도 하며, 유리거울이 보급된 이후 빗접에 거울을 부착한 것으로, 빗의 발전된 형태라 할 수 있다.
빗접은 소함(梳函)이라고도 불리며, 주칠(붉은색 칠)과 나전칠기 제품이 많은 편이다. 세종 임금 때에도 나전 소함이 제작되었다. 남성용은 매우 작지만, 여성용은 대개 3단 서랍이나 2단 서랍과 1단 칸으로 구성된 두 가지 양식이 있다. 잠금장치가 있는 것으로 보아 값비싼 수식품도 보관할 수 있었다고 여겨진다. 조선시대 나전 빗접은 중국과의 중요한 교역품이었다는 사실은 『지봉유설』에 기록되어 있다.
『임원경제지』에는 남성용 소갑은 나무로 목침을 크게 만들고 여닫는 문을 달아내면에 빗 하나, 참빗 2~3개, 빗솔 하나, 소조치 하나, 퇴발낭 하나를 넣어둔다고 기록되어 있다. 재료는 오동나무로 만들어 침향색을 띠게 하거나 나무의 안팎을 칠한다고 하였다. 부인용은 크기가 약 30cm 정도로, 상하로 칸을 내고 상단에는 좌우로 칸을 만들어 참빗, 빗솔, 십자, 민자, 퇴발낭 외에 분지(분말 화장품)와 향택류(향수류)를 넣었다. 통영산에서 제작된 나전칠기를 가장 좋은 것으로 여겼으며, 이는 현존하는 많은 빗접의 양식과 설명이 일치함을 보여준다.
궤경대(경대)는 빗접보다 후에 등장한 양식으로, 뚜껑의 반을 절개하여 경첩을 달고 뚜껑 안쪽에 거울을 부착하여 뚜껑을 열면 거울을 세울 수 있도록 설계된 형태와, 뚜껑이 통판으로 되어 돌려 열고 뚜껑이 받침 다리가 되어 거울을 세울 수 있게 된 형태도 있다. 수장공간으로 1~2개의 서랍이 달린 것, 거울 밑에 공간이 있어 빗과 빗치개 등을 보관할 수 있는 것, 거울만 달린 것 등 다양한 양식이 존재한다. 서랍이 없거나 하나만 있는 것은 대부분 사랑방에서 사용되었다.
2. 상(狀) · 탑(榻)과 의자
한한자전에 따르면 탑(楊)은 평상, 자리의 뜻을 가지고 있으며, 상(狀) 역시 평상, 마루, 걸상, 의자 등을 두루 가리키는 용어임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의 여러 기록에 의하면 탑은 좌석으로, 상은 침상의 뜻으로 사용된 예가 많다. 그러나 탑의 경우 와탑(臥楊)이라 하여 침상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상과 탑은 좌석과 침상의 뜻이 모두 포함되어 있으므로, 기록의 전후 문맥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음을 밝힌다.
탑의 기원에 관해서는 중국 한나라의 예장태수 진번이 학자인 그의 스승 서치(79~168)를 존경하여 그를 정중히 모시고자 탑을 만들었다고 한다.
평상은 삼국시대부터 사용되었음을 고구려의 동수묘, 사신총, 쌍영총, 무용총 등 여러 고분벽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또 고려시대에는 『고려사』, 『고려도경』의 기록들이 평상의 사용을 입증해 준다. 『고려도경』 향음(鄕飮)에 “공회(공회) 때에는 다만 왕부(왕府)와 국관(國官)만이 상탁(탁자)과 반찬(반찬)이 있을 뿐, 그 나머지 관리와 사민은 다만 좌탑(坐楊;평상)에 앉을 뿐이다.... 지금 고려인은 탑 위에 또 소조(小姐;작은 소반)를 놓고, 그릇에는 동(銅)을 쓰고 탑마다 다만 두 손님이 앉을 뿐이니, 만약 빈객이 많이 모이면 그 수에 따라 탑을 늘려 각기 서로 마주 앉는다”고 하였다. 위의 내용에서는 상은 탁자와 함께 사용하는 의자를 의미하며, 탑은 의자보다는 넓은 평상의 개념임을 알 수 있다.
『삼봉집(三集)』의 「동정의 죽림에 봉제하다」(죽림이라 깊은 곳에 살평상 배치하니)는 당시의 평상 사용 관습을 보여주는 시로, "죽림 깊은 곳에 평상 배치하니, 유월 남방에도 이 한쪽은 서늘하이, 대낮에 홀로 누워 도시를 읽노라니, 바람 불어 맑은 이슬 의상에 떨어지네"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또 어세겸(1430~1500)의 「탑(楊)」 명(銘)에 “몸을 의탁하는 곳이라, 너를 고이 받들어서, 기울지도 말고 비스듬하지도 말아, 나로 하여금 올라앉게 하라”고 하였으며, 『청장관전서』의 「성제(聖際)의 서재」 시에는 "자취 감춘 숨은 사람 세속을 벗어나, 누대는 수풀 격해 저자 소리 들리지 않네, 정겨운 목탑은 손님 맞아 베풀었고"라는 내용으로 탑이 의자의 한 종류임을 알 수 있다.
유중임은 『증보산림경제』의 목탑에 대해 "여러 백년 묵은 나무뿌리는 살이 삭고 뼈대만 남아서 그 생김이 기괴하니 그 가운데 탑형에 방불한 것을 골라 그 머리를 톱으로 잘라 펑퍼짐하게 하고 다리를 만들되 거기에 덧붙여 일체 새나 짐승의 모양을 새기지 말 것이며 또 주황 등으로 칠하지 말 것이니 속된 취향에 빠지는 것을 저어함이다. 때로 좋은 나무 아래에 혹은 맑은 연못가에 두고 거좌의 기구로 삼는 것이다"라고 하여 그 소재의 소박한 것과 모양의 기괴함을 취하였다. 그러나 결코 인위나 인공을 가해 부자연스럽지 않도록 주의하였다.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지는 않았으나 궁궐·관공서에서의 집무와 연회, 재력 있는 선비와 사대부의 서재에서 사용되었다. 방형의 탑과 교의의 구별이 있으며, 대로 만든 의자는 여름철에 사용하였다. 중국제의 등직 좌판이 달린 의자는 상품으로 여겨졌다. 요즈음 스툴(STOOL)이라고 하는 원형 방형의 돈(墩)도 사용되었으며, 의자의 앞에는 연궤라는 중국식 탁자를 설치하였다. 좁고 긴 이 탁자 위에는 붓과 벼루, 서책 등을 두었다. 이밖에 '대'라고 하는 연회용 소탁자가 있다.
조선 중기 이후 온돌의 보급으로 평상 사용은 점차 줄어들었으나 궁중, 사찰, 사대부 및 선비계층, 살림에서 손을 뗀 노부인 등 상류 계층에서는 여전히 평상을 사용하였다. 평상은 일찍이 중국의 영향을 받았으나, 그 양식에 있어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중국의 평상은 높은 다리에 바닥은 판재이며 3면은 난간으로 된 단평상을 주로 사용한다. 우리 나라의 실내용 평상은 예외적인 경우도 있으나 대체로 낮은 다리, 낮은 난간에 바닥은 목제의 띠살 또는 대쪽을 대었으며 두 개를 맞붙여 사용하도록 된 짝평상이 특징이다. 여름에는 띠살 사이로 통풍이 되어 시원하며, 겨울이면 온돌의 온기가 띠살 사이로 올라와 따뜻하다. 평상 위에 여름에는 돗자리를, 겨울에는 보료나 담요를 깔았다. 이 평상은 두 쪽으로 나뉘어져 이동하기에 편리하며, 겨울에는 방에, 여름에는 누마루에 두었으며, 때로는 밖에서도 사용하였다. 헌종의 계비인 명헌왕후는 고종이 하사한 평상에서 잠을 잤으며, 또 그 위에서 임종을 맞았다.
평상과 탁자 등에 대한 그림은 『동국삼강행실도』 및 『오륜행실도』 등에서 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의자와 관련된 자료로 영정에 그려진 교의를 들 수 있는데,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 이경석(1595~1671)이 1668년에 하사받은 궤장 중에 현재까지 전해오는 교의가 있다. 이밖에 공식적인 연회장면을 그린 『조일통상조약 기념연회도』에서 탁자와 의자의 형태를 볼 수 있다.
3. 궤(几)
궤는 앉았을 때 겨드랑이 밑에 꿰어 편히 기대게 하는 제구이다. 신라 문무왕 때 중국 한나라 공광의 고사에 의거하여 삼국 통일에 공을 세운 김유신에게 궤장(几杖)을 하사하기 시작한 이래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 말기까지 그 전통은 계승되었다. 또한 『예기』에도 노인에게 8월에 궤장을 하사한다는 기록이 있다. 『삼재도회』의 「궤」에는 상체를 기댈 수 있는, 즉 의자의 다리 부분이 없는 그림이 있으며, 우리나라 『세종대왕실록』「오례의」의 궤 도면은 팔걸이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그 도면은 우리나라에서 임금이 중신에게 하사한 것이라고 전해지는 궤의 양식과 유사하다.
궤의 양식은 크기(총 길이 70~75cm, 높이 30cm 정도)가 크고 장식은 구름무늬, 영지 등을 음양각 하였으며 양측에 투공된 판각의 다리가 대었다. 일반인들의 사제 팔걸이는 규모가 작으며, 투각한 3개의 다리로 상하판을 연결시켰고 위와 아래의 구별 없이 사용할 수 있다.
중신에게 하사하던 궤장은 조선 건국 직후에는 실시하지 않다가 세종 때에 나이 많은 대신에게 궤장을 줄 것을 예조에서 아뢰므로 실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세종 14년 4월 22일 경술에 궤장제도에 관한 논의가 있었다. 그 내용은 궤장은 원래 궤를 주는 것인데, 당시 궤가 아닌 의자를 줌으로써 그 제도에 어긋난다는 지적이 있었으나, 전례에 따라 의자를 주기로 결정하였다. 이와 같은 결정에 따라 계속 의자가 주어졌으며, 숙종 때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숙종 임금에게 바칠 궤장에 관한 논의가 있어 『주례(周禮)』에 따라 형태는 기(丌)와 같으며 발이 달린 궤를 만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