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전통 농경 문화
우리 나라는 동해 근처 북쪽에서 남쪽으로 태백산맥이 뻗어 있고, 서쪽으로 흐르는 작은 산들 사이에는 좁지만 비옥한 평야가 펼쳐져 있어 일찍부터 농업이 발전했다. 지리적으로 온대 지역에 속하며 기후는 대륙성 기후를 보인다. 이로 인해 풍토도 매우 다양하다. 좁은 이 땅에 열대나 온대식물은 물론, 지중해성 식물과 사바나 식물까지 합해 300여 종이 재배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자연적인 혜택 덕분이다.
우리 농업의 역사는 아주 오래되었다. 신석기 시대 후기에 조와 피가 생산되었고, 청동기 시대 초기에 벼농사가 시작되었으며, 이후 기장, 수수, 콩, 팥 등이 재배되었다. 특히 벼농사는 우리나라 남부 지역에서 김해 시대에 이르러 일반화되었다. 삼국 초기부터 벼농사의 중요성은 크게 인식되었으며, 『삼국사기』의 신라 본기나 백제 본기를 보면, 이때 제방을 새로 만들거나 수리한 기사가 자주 보인다. 특히 백제에서는 A.D. 33년에 지금의 경기도 남쪽과 충청도 지역에서 처음으로 논을 풀었다고 한다. 이는 벼농사가 중부 지역까지 확산된 중요한 사실을 알려준다.
한편 『후주서』에는 고구려는 세금으로 비단과 조를 거두고, 백제는 베, 명주, 삼, 쌀 등을 징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고구려를 비롯한 북부 지역에서는 조, 피, 기장 같은 밭곡식이 주요 식량이었고, 백제를 비롯한 남부 지역에서는 쌀이 주식이었다. 북부의 밭농사와 남부의 논농사는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차이를 보였다. 17세기 중반 논과 밭의 경작지를 비교한 결과, 삼남 지방에서는 논 경지 면적이 40% 이상을 차지하고, 북부 지역은 물론 황해도(16%)와 강원도(13%)는 20%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러한 경향은 오늘날까지 큰 변화 없이 이어지고 있다.
신라 초기에는 보리를 가을에 심어 이듬해 초여름에 수확하고, 그 후에는 콩류를 심어 늦가을에 수확하는 1년 2작 경작 방법이 시행되었다. 이를 통해 농업 생산량이 늘어나고 토지의 비옥함도 유지되었다. 7세기에는 봄철에 논에 물을 대어 벼농사를 짓고, 벼를 거둔 후에는 다시 보리를 심어 이듬해에 수확하는 2모작 방식이 확립되었다. 이렇게 보리와 콩을 두 번 심는 윤작 방식(밭)과 벼와 보리를 번갈아 심는 2모작 방식(논)은 당시 농업 기술의 중요한 발전이었으며, 이 방법은 고려와 조선 시대 농업의 중심을 이루었다.
고려 중기에는 오이, 가지, 미나리, 파, 무 등의 채소가 널리 보급되었고, 술, 기름, 장류 같은 가공품도 만들어졌다. 『농사직설』과 『금양잡록』에 의하면, 이때 농작물의 종류가 늘어나 벼가 27종, 콩류가 20종, 조가 5종, 기장이 4종, 피가 5종, 수수가 3종, 보리가 6종이 되었다. 또한 모판 설치, 모내기, 비료 만들기, 묵밭 갈기 등도 활발히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최근에는 외국에서 새로운 식물이 수입되어 우리의 식물상도 더욱 풍부해졌다. 고구마는 1763년에 일본 대마도에서, 감자는 1824년에 중국 동북부에서 함경도로 들어왔고, 19세기 중엽에는 경기와 강원도 지방에도 널리 퍼졌다. 북미 대륙에서 온 옥수수는 1700년경 중국을 거쳐 전래되었다.
이제 논농사, 밭농사, 부대기(田) 및 길쌈농사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겠다.
1. 논농사
고서(古書)에 소개된 볍씨의 종류는 모두 54종에 이른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종류의 볍씨가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가 쓰여지던 시기에 모두 재배된 것은 아니며, 실제로는 10여 종에 불과했을 것이다. 김응남(70세), 민병수(68세)님의 증언에 의하면 1920년대에 이 곳에서 재배된 볍씨는 갈곳베 [수염이 길고 갈대 비슷한 벼] • 보리흔베 [빛이 흰 벼] • 팥베 [빛이 흰 벼] • 팥베 [붉은 빛 벼] • 보리 붉은베 등 4종뿐이었다고 한다. 한편 1930년경 평안북도 박천군에서는 애달조[빛이 흰 벼] • 대구벼 [붉은 기운이 돌고 애달조보다 부드러운 벼] • 밤벼 [대구벼보다 더 붉은 벼] • 올벼 • 찰벼 등이 있었으며 개량종으로는 구미(龜尾) • 육우(陸羽)가 있다고 한다.
박천에서는 볍씨를 뿌리는 데에 건파(乾播) • 이앙(移秧) • 산종(種)의 세 방법을 이용했다. 건파는 그 해에 논에 댈 물이 부족할 것으로 예상되면 논을 마른 대로 갈고 골을 쳐서 밭곡식을 심듯이 볍씨를 뿌리는 방법이다. 건파한 뒤에 다행히 비가 오면 그대로 물이 고이지 않는 논이 되며 이후의 경작은 물이 고이지 않는 논처럼 진행된다. 그러나 비가 오더라도 싹이 볏모만큼 자라야(약 15cm) 물을 대야 한다. 건파논의 쌀은 잡풀이 적다.
산종은 물이 부족해서 모를 낼 수 없을 때에 사용된다. 따라서 모를 붓는 시기보다 늦어진다. 씨를 직파(直播)하는 방식으로, 벤 데는 베고 드문 데는 드물어서, 싹이 나온 뒤에 벤 데를 떠서 드문 곳에 심어준다. 산종은 이앙식(이앙 방식)보다 소출이 많은 장점이 있으나 김매기가 어렵다. 박천에서는 1930년대까지도 모를 붓기보다는 산종을 더 많이 하였다. 이앙식과 산종식은 여기에서 수부종(水付種)이라고 불렸다.
모를 붓는 방법은 충남 아산군 음봉면 일대에서 행해지는 방식을 예로 들 수 있다. 볍씨는 볍씨라고 하며 오쟁이에 넣어 사랑방 뒷벽의 시렁 위에 얹어둔다. 못자리를 만들기 전에 먼저 못자리비료로 사용할 모풀을 준비한다. 정월 그믐께 각시풀(길이 10여㎝)을 캐서 흙을 털어 말리며, 조금 뒤에는 낫으로 베어 들이기도 한다.
못자리가 선택되면 쟁이로 갈고 정월 스무 날 무렵부터 써레로 썬다. 써레질은 장써레라고 하여 맞덮고 두 번 갈아엎으며, 다시 십자(十字) 모양이 되도록 써서 이를 곱써레라고 한다. 이렇게 두 번을 갈아야 '땅이 고루 익는다.' 못자리는 2000평의 논을 가진 경우 200평을 마련한다. 써레질 뒤에는 고무래로 흙을 걷어올려 개탕을 치고 판을 만들며, 다시 죽가래로 판판하게 고른다. 이를 '번디친다'고 한다. 이때 애거름인 모풀과 재를 깔고 발로 밟아준다. 이때 중거름을 주고 나서 열흘 내지 보름이 지나면 모는 옮겨 심기 좋을 정도로 자란다.
모는 깊은 데서부터 심어 나가며, 처음 자리는 그 날의 바람의 방향을 보아 정한다. 모는 바람을 등지고 심어야 하기 때문이다. 열흘쯤 지나서 손으로 풀을 뽑거나 벼 포기를 만져 주는 '더듬이'를 한다.
경기도 파주에서는 논을 '애벌' • '두벌' • '삼동' 등 세 번 매며, 두벌과 삼동 때에는 호미를 쓰지 않고 '손으로 훔친다' (그러나 영동에서는 세 번 모두 손으로 맨다). 충북 괴산에서는 '아이'와 '이듬'이라 하여 두 번만 매며, 아이 맬 때에는 풀을 손으로 쥐고 호미로 긁어서 뒤집어 주며, 일주일 내지 열흘쯤 지나 이듬 맬 때에는 패인 데를 발끝으로 눌러서 평평하게 하고 살아남은 풀은 손으로 뽑는다. 전남 고흥에서는 논매는 일을 ‘초벌' • '중벌' • '만물'이라고 하며, 갯논은 네 번 매어 준다.
벼를 베는 데에는 '쥐고 베기'와 '엎쥐고 베기'의 두 방법이 있다. 예전에는 벼를 늦게 베어(꼬부라진 뒤에) 모두 잦쥐고 베었으나 근래에는 벼와 보리를 모두 엎쥐고 벤다. 볏단은 세 주먹만큼의 양을 한 이라 하고, 스무 뭇을 한 가리라고 한다. 영동에서는 벼를 다발로 묶으며, 쌀 한 되 가량 될 만큼을 한 다발이라 하고, 스무 다발을 한 광이라고 한다. 말릴 때에는 스무 뭇을 단위로 하여 논바닥에 동서(東西)로 20여 일간 세워둔다. 이렇게 해야 아침의 동풍(東風)과 저녁의 서풍(西風)을 받아 잘 마른다. 영동에서는 장광이라고 하여 볏단을 한 줄로 나란히 세워 말린다. 이때에는 한 광마다 벼를 한 모습씩 거꾸로 세워서 표시한다.
잘 마른 볏단은 집으로 옮겨와서 서로 엇걸어 묶어(이를 장구단이라고 한다) 집가리로 쌓아 두었다가 마당질을 해서 떨거나 집채[벼훑이]로 알갱이를 훑어 낸다. 마당질은 품앗이를 주어서 하는 것이 보통이다.
2. 밭농사
① 서속 [서울(黍栗)]
서속은 본래 기장과 조를 의미하는 말이지만, 평안남도 박천군 일대에서는 콩과 팥을 제외한 조, 수수, 기장 등의 잡곡을 이렇게 부른다. 다음으로 이 지역에서의 밭농사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겠다.
서속은 곡우(4월 중순)와 입하(6월 초) 사이에 씨를 뿌린다. 지난해 곡식을 심었던 자리인 두둑의 가운데를 후치라는 농기구로 째서 씨를 뿌리는데, 이를 회종법이라 한다. 한편 바람이 세게 불어서 씨앗이 날릴 위험이 있을 경우, 자치통이라는 연장을 사용한다. 자치통은 가죽이나 나무껍질 또는 종이를 여러 겹으로 붙여서 원뿔 모양으로 만든 도구로, 길이는 1미터, 윗지름은 15~20㎝, 바닥지름은 약 10㎝이다. 이 도구의 윗부분에는 끈을 달아 어깨에 멜 수 있게 만든다.
씨를 뿌린 후에는 재를 놓고, 개지라는 연장으로 흙을 덮는다. 개지는 흙을 덮는 데 쓰는 도구로, 가지가 많은 소나무를 길이 50~60㎝ 정도 자르고, 그 위쪽에는 적당한 크기의 돌을 새끼로 동여매어 만든다. 개지를 끌고 다니면 돌이 땅을 비비게 되고, 아래쪽의 솔잎들이 흙을 덮는다. 개지로 덮은 뒤에는 짚신을 신은 부녀자들이 씨앗이 묻힌 곳을 발로 꾹꾹 밟는다.
서속밭은 세 번 매는데, 이를 '아이', '두불', '세불'이라 한다. '아이'를 매는 때에는 언덕진 양쪽의 흙을 제쳐서 매기 때문에 곡식이 자라는 쪽은 오목해지고, 반대쪽은 두둑해진다. 조의 경우, 약 20㎝ 정도 자라면 두불을 매는데, 이때는 '아이'를 매는 방법과 반대로, 두둑해진 가운데를 째어 나간다. 그런 뒤에는 호미로 조가 있는 쪽으로 흙을 긁어 넣으며 매고, 2~3일 후에 후치로 깊은 곳을 째어 준다. 두불을 매고 보름쯤 지나면 다시 후치질을 하여 세불을 매고, 열흘쯤 지나면 또 후치질을 한다. 이렇게 하면 골이 깊어져 장마 때 물이 잘 빠지게 된다.
후치로 째는 대신 연장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따라서 조를 심은 이듬해에는 다른 곡식을 심어야 하며, 목화, 콩, 팥, 기장 밭 등은 후치를 사용하지 않고 연장으로 간다. 이때 사용하는 연장에는 겨리소라는 도구가 있다. 겨리소는 왔다갔다 하며 좌우로 흙을 떠넘기며 갈아 나간다. 후치의 보습은 크기에 따라 다르며, 매는 정도에 따라 적당한 보습을 사용한다. 가장 작은 보습은 윗부분이 25㎝, 중간 것은 30㎝, 큰 것은 35㎝이다. 가장 작은 보습은 밭두둑을 두 번째로 째는 때 사용된다.
② 콩
콩은 망종을 전후한 5월 초에 심는다. 팥이나 양대(동부) 등도 거의 같은 시기에 심지만, 땅이 약간 습한 곳에서는 콩을 먼저 심는다. 씨는 허리에 찬 뒤웅박이나 다래끼에 담아서 이랑을 호미로 판 뒤, 씨를 놓고 다시 흙으로 덮는다. 잘하는 사람은 호미로 파고 씨를 놓고, 발로 밟는 세 동작을 거의 한꺼번에 해치운다. 콩은 한 번에 열 알을 묻으며, 포기 사이는 발 하나 정도의 간격을 두지만, 팥은 조금 더 간격을 좁게 심는다. 콩밭에는 거름을 주지 않는다.
콩은 거두는 시기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콩을 거둘 때에는 호미로 콩대를 끊고 단을 만들어 짚으로 묶은 뒤, 밭가에 서로 엇걸어 가리어 놓고 말린다. 집으로 옮긴 뒤에는 뿌리가 밖으로 향하도록 둥글게 낟가리를 쌓아 두며, 필요할 때마다 내려서 도리깨로 털어낸다. 이를 마당질이라고 한다. 대는 걷어서 쌓아 두며, 깍대기까지는 깍닥우리(깍지를 넣어 두는 우리)에 넣어 갈무리한다.
마당질이 끝나면 갈퀴로 대나 깍대기 등을 긁어모은 후 콩을 거두고, 키에 드리운다. 이때 맞은편에서 탕석(붓)으로 바람을 일으켜 먼지 등의 잡물이 날리도록 한다.
콩을 고르는 또 다른 방법도 있다. 마당에 멍석을 깔고 좌우에 지게를 놓은 뒤, 두 지게의 새고자리를 사이에 막대를 걸고, 그 막대에는 쑥대로 엮은 발을 걸쳐둔다. 발의 너비는 약 70㎝ 정도 되며, 지면과 발이 이루는 각도는 45도쯤 되게 한다. 사람은 큰말을 엎어놓고 그 위에 올라서서 쑥대발 쪽으로 콩을 드리우며, 맞은편에서는 붓질을 해서 바람을 일으킨다. 이렇게 하면 콩이 발 아래로 흘러내릴 때 흙은 발의 날과 날 사이로 떨어지며, 먼지나 잡것들은 바람에 날리게 된다. 고른 콩은 말로 되어서 멱서리나 섬에 넣어 갈무리한다.
③ 강냉이
강냉이는 소만(小滿)에서 입하(夏) 사이에 심는다. 강냉이밭은 후치로 왔다갔다 두 번 갈아서 이랑을 지으며, 사람이 걸어가면서 깊은 발자국을 남긴다. 다음 사람은 삼태기의 거름을 한 덩이씩 떨어뜨리며, 세 번째 사람은 한 자국에 씨를 세 개씩 놓고, 마지막 사람은 이를 한 번 밟고 흙으로 덮어 준다. 한 자국에서는 대가 셋이 나오지만, 아이를 맬 때에는 두 대만 남기고 약한 것은 뽑아낸다.
강냉이밭에는 '자구넘이'를 한다. 강냉이는 80~100cm 정도의 간격으로 심어 나가며, 대와 대 사이의 빈 곳에는 주로 콩을 심는다. 자구넘이는 이처럼 한 자국마다 번갈아 가며 다른 곡식을 심는다는 데서 온 말이다. 콩은 강냉이의 싹이 보이기 시작할 때 심으며, 콩이 나와서 속잎이 퍼질 때 아이를 맬 때 한다.
강냉이는 거두어서 껍질을 벗긴 후 새끼로 곱새(이영)처럼 엮어 길게 타랭이(타래)를 지어 말린다. 잘 마른 강냉이는 알갱이를 손이나 도리깨로 쳐서 떨어 낸다.
④ 메밀
메밀은 생장력이 강해서 다른 곡식은 심어서 잘 되지 않는 척박한 땅에 심는다. 풀밭을 새로 개간하거나 부대기(화전, 불을 사용해 경작한 밭)로 일구어 놓은 밭에 심는 일도 있다. 메밀밭은 갈기도 하지만 보통은 골도 타지 않은 채 손으로 씨를 훌훌 뿌린다. 이 밭은 두 번 매며 베어가두어서 묶어 놓았다가 개상에 태질을 쳐서 알곡만 가려낸다. 메밀씨는 40평에 한 되 정도 뿌리며, 씨가 흙에 묻히도록 하기 위해 극젱이로 왔다갔다하면서 얕게 갈아준다. 메밀은 한쪽에만 흙이 묻어도 잘 살아난다. 김은 매지 않는다. 8월 말이나 9월 상순에 거두며, 볏단처럼 묶어서 20일가량 세워 두었다가 탯돌에 쳐서 알갱이를 떨며, 다시 맷돌에 타서 껍질을 벗긴다. 40평 밭에서는 소두 닷말(껍질을 벗기지 않은 것)을 거둔다.
⑤ 기장
기장은 소출이 적고 거두는 일이 매우 까다로워서 많이 심지 않으나, 비를 매어 쓰기 위해 심는 일이 있다. 기장은 강냉이보다 간격을 좁게(50~60cm) 심으며, 자구넘이로 녹두를 심는다. 거둘 때에는 대를 낫으로 베며, 묶어서 집으로 옮겨 놓은 뒤에 이삭이 달린 목을 쥐고 뒤쪽으로 잎이 다 떨어지도록 훑어 내린다. 이렇게 해서 대가 한 웅큼쯤 모이면 서로 묶고, 이삭에서 30cm가량 떨어진 곳을 잘라 버리고 목만 남겨 둔다. 알이 달린 부분은 발로 비벼서 알곡을 떨어내는데, 그래도 잘 떨어지지 않는 것은 땅에 놓고 호미날로 박박 긁어서 떨어낸다. 그리고 빗목은 시래기 엮듯 엮어서 매달아 말린다.
⑥ 밀
황해도 재녕에서는 밀 심는 일을 추경(가을에 농사짓는 일)이라고 한다. 그래서 밀을 심었느냐고 물을 때 추경했느냐고 한다.
밀은 조 밭에 심으며 조를 베어 낸 뒤에 이랑을 갈고 골에 재와 금비를 뿌린 뒤에 밀알을 20~15알씩 놓는다. 두 사람은 양쪽에서 고무래로 흙을 덮어 나간다. 재를 충분히 놓아야 겨울에 얼어죽지 않는다. 밀밭은 매지 않으며 하지(여름의 시작) 조금 뒤에 거둔다.
밀을 벨 때에는 세 이랑을 단위로 하여 가운데 이랑을 능숙한 사람이 맡는다. 벤 것은 모아서 밀대로 묶어 두며 집으로 옮겨서 마당질을 한다.
밀밭 이랑에는 보통 팥을 심으며 이를 '대우친다'고 한다. 팥은 망종(여름 초)과 하지 사이에 심는다. 호미로 파고 알을 10여 개 놓으며 다시 호미로 덮고 발로 밟으며 한로(한여름의 시작) 무렵에 거둔다. 한편 밀을 거두고 나서 그 이랑에 녹두알을 뿌리며 후치로 양쪽을 갈아서 흙을 덮는다. 녹두는 심은 뒤 20일쯤 지나서 한 번 매어 주며 팥과 함께 거둔다.
⑦ 보리
강원도 명주군에서는 8월 하순부터 9월 초순 사이에 보리를 심는다. 보리밭은 고랑을 치기 위해 한 번 갈며 골과 골 사이는 7~8치의 간격을 둔다. 골을 지은 뒤에는 인분(사람의 배설물)을 주며 씨는 똥재(퇴비)와 섞어서 뿌린다. 보리씨는 70평에 한 말 정도가 적당하며, 똥재는 한 삼태미(큰 대야의 양)를 쓴다.
겨울을 지내고 2월 하순 내지 3월 초순 사이에 쇠스랑으로 드문드문 매어 준다. 거두기는 4월 하순에서 5월 상순 사이에 하며, 마르면 떨기 어려워서 당일 마당질에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