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민속 문화

다양한 전통 사냥법(매 사냥)

solid-info 2025. 4. 11. 18:29

다양한 전통 사냥법(매 사냥)

 

 매를 길들여서 꿩이나 토끼 등을 잡는 매사냥은 옛날 이집트, 아시리아, 페르시아 같은 나라에서 했다는 기록이 있다. 사냥은 인도에서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로 인도에서 크게 유행했으며, 중국에서는 원나라 인기를 끌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매사냥이 이루어졌고, 만주와 북한 지방에서는 '해동청'이라는 좋은 품종의 매가 나와 중국과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매사냥은 특히 양반층 사이에서 유행했으며, 고려와 조선 시대에는 매를 기르고 사냥을 담당하는 관청인 '응방'따로 있었다.

 

 응방은 고려 충렬왕 처음 만들어졌고, 이를 운영하기 위해 몽골에서 사람을 데려오기도 했다. 조선 시대에도 응방 제도는 이어졌는데, 태종은 응방 인원이 너무 많다고 하여 16명으로 줄이기도 했다.

 

 하지만 연산군 때는 오히려 '좌응방''우응방'으로 나누고 각각 관리와 병사 400명씩을 두었으며, 겸사복 10, 내금위 70등으로 조직을 확대해 전문적으로 매를 잡도록 했다. 중종 때에는 관리인 최산두가 지방에서 매를 바치게 하는 폐단이 크다며 응방 제도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해 남쪽 지역에서는 의무가 없어졌지만, 북쪽 지방에서는 계속 시행되었다. 외에도 응방을 두느냐 마느냐에 대한 논의가 많아, 없앴다가 다시 만들기도 했다.


 한편 매사냥은 일반 백성들 사이에도 퍼져서, 일제강점기에는 거의 전국에서 행해졌다. 매는 새끼일 잡은 보라매, 산에서 자연스럽게 자란 산진이, 그리고 어린 새를 잡아다 집에서 기른 수진이가지로 나뉜다.

 

 강원도 평창에서는 산진이를 잡을 '뒤피'라는 덫을 쓴다. 이는 물푸레나무를 둥글게 엮은 (지름 1m), 뒤쪽은 말뚝에 고정시키고 반대쪽 끝에는 돌을 달아 끈으로 묶는다. 돌이 달린 쪽이 약간 들리게 해서 끈을 나뭇가지에 연결한 , 산닭을 안에 넣고 나뭇잎 등으로 가려 매가 때까지 숨는다. 산비둘기를 미끼로 쓰기도 하는데, 새들은 멀리서 매가 보여도 울고 불안해하기 때문에 매가 오는 것을 미리 있다.


 매는 꿩을 잡은 곳에 다시 오는 습성이 있어, 자리에 뒤피를 놓는다. 만약 꿩을 잡은 흔적을 찾으면, 눈에 띄는 산봉우리 위에 덫을 놓고 미끼를 주며 꾸준히 기다린다. 안에는 길이 3되는 후릿대설치해서, 매가 미끼를 덮칠 걸리게 만든다. 매는 식사 전에 특히 들어온다. 매가 덫에 걸렸을 때는 정면으로 가지 말고 옆으로 가서 덫을 덮고 장갑 손으로 조심히 꺼낸다. 지역에 따라 이름은 덮재기(인제), 덮치기(이천), 두피(평북) 등으로도 불린다.

 

 이 외에 '매장'이라는 방식도 있는데, 이는 그물을 쳐서 매를 잡는 것이다. 길이 3미터쯤 되는 장대를 세워 직각삼각형 모양으로 만든 , 양쪽에 그물을 걸고 그물 아래는 말뚝에 끼운 가지로 고정해 작은 움직임에도 그물이 휘감기게 한다. 가운데 기둥에서 빗변 쪽으로 4~5미터 떨어진 곳에 구덩이를 파고 사람이 들어가 숨어 있는데, 이를 ‘매막’이라 한다. 매는 미끼를 보고 그물 있는 걸 모르고 날아들다 그물에 걸린다.


 매를 부려 꿩을 잡는 사람은 지역마다 다르게 부른다. 평창, 이천, 금릉에서는 ‘수할치’, 홍천, 금릉에서는 ‘봉받이’, 인제에서는 ‘매받이꾼’이라고 한다. 금릉에서는 보통 ‘매방소’라 하지만 산신제 때에는 ‘수치’라 부른다.


 매사냥에는 수치 외에도 ‘털이꾼’과 ‘배꾼’이 함께한다. 털이꾼(보통 4~
5, 많으면 7~8)잔솔밭에 숨어 있는 꿩을 작대기로 두드려 날리고, "우우" 소리를 내며 쫓아낸다. 꿩이 날면 "디워디워" 하고 외쳐 수치에게 알린다. 배꾼은 매나 꿩이 날아간 방향을 털이꾼에게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멀리 떨어져 있을 때는 사냥터 건너편 위에서 방향을 알려주는데, 이를 배본다한다. 어떤 지역에서는 배꾼 없이 수치와 털이꾼만으로 사냥하기도 한다.

 

 매 훈련법은 다음과 같다. 약 30미터 거리의 말뚝 사이를 줄로 연결하고, 매의 다리에 부드러운 가죽끈(‘젓갈끈’)을 묶어 줄에 꿴다. 사람이 줄 한 쪽에 서서 산닭을 들고 "쥬쥬" 하면 매가 매받이의 손에서 닭을 향해 날아든다. 매가 먹는 것을 ‘밥’이라고 하며, 평소 먹는 밥과 구별한다. 훈련은 한 달쯤 계속되며 이 때쯤이면 매가 사람에게 익숙해지고 사냥 실력도 늘어난다.


 훈련된 매는 ‘통홰’에서 생활한다. 통홰는 나무토막에 길쭉한 막대기를 꽂고, 그 위에 짧은 막대기를 가로로 박아 회전하게 만든 구조로, 매는 여기에 묶인 줄로 움직인다.


 사냥 전날에는 매가 긴장하게 하기 위해 잠들지 않게 가슴을 번갈아 쓰다듬는다. 저녁에는 목화씨 7~8개를 먹이고, 아침에 토해낸 씨가 노랗게 변했는지를 본다. 이는 매의 뱃속 기름기가 빠졌는지를 보는 방법이다. 어떤 지역에서는 피 묻힌 솜을 세 번 먹여 토하게 한 다음 사냥을 나가기도 한다.


 매사냥은 늦여름부터 시작해 눈이 많이 오지 않으면 겨울에도 한다. 기간은 일정치 않지만 일주일에서 열흘쯤 걸린다. 이렇게 멀리 나가서 사냥하는 것을 ‘난 사냥’이라고 한다. 매 한 마리가 하루에 잡는 꿩 수는 일정치 않으나 보통 15마리쯤 된다.


 매가 꿩을 잡으면 꿩의 눈을 쪼고 뇌를 먹는다. 매가 꿩을 쥐고 있을 때 꿩을 빼낼 때는 무릎을 세우고 꿩을 아래로 내려쥐듯 조금씩 빼야 한다. 매의 힘은 발톱에 집중되어 있어서 조심하지 않으면 발톱이 빠질 수도 있다. 꿩을 빨리 빼앗지 않으면 매가 배가 불러 날아가버릴 수 있다. 이를 막기 위해 수치의 이름과 주소를 적은 얇은 소뿔을 매 꽁지에 달아둔다. 평창에서는 ‘단장구’, 평북에서는 ‘시치미’라 한다. 하지만 사냥 잘하는 매는 돌려주지 않으려는 경우가 있어, 수치만 아는 비밀 표시를 따로 해두는 경우도 많다. 이천에서는 ‘빼깃’이라 하여 기러기 깃털을 꽁지에 달기도 하는데, 장식과 표식 역할을 함께 한다.

 

 잃어버린 매를 찾으면 돌봐준 사람에게 사례를 하는 것이 예의며, 보답으로 그 마을에서 사냥을 해 주기도 한다. 매는 사고팔기도 했는데, 일제 중기에는 보통 쌀 다섯~여섯 가마 값에 거래되었고, 아주 좋은 매는 소 한 마리 값으로 치기도 했다. 매로 잡은 꿩은 총으로 잡은 꿩보다 더 비쌌으며, 보통 닭 한 마리 가격 정도였다.


 1970년 당시 76세였던 이천 창전리의 김익환 씨에 따르면, 1966년 무렵까지도 이천읍 근처에서 매사냥을 했다고 한다. 김씨는 용인 범안골의 신당리 고개에서 매를 많이 받았는데, 가을이면 보통 10자루, 많을 때는 30자루에 이르렀다(여기서 '자루'는 매 한 마리를 뜻한다). 매 중 큰 것은 길이 7~8치, 작은 것은 6치 정도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매사냥도 관청의 허가를 받아야 했고, 허가비가 비싸 매 한 마리 값이 들었다. 허가서는 신분증처럼 사진과 사냥 구역이 적혀 있었고, 해마다 새로 발급받아야 했다.

 

 매의 발톱은 매우 날카로워서 솜을 넣은 덧팔토시(‘버랭’)를 끼고 팔 위에 얹는다. 매사냥은 음력 3~4월에는 잘 하지 않는데, 이 시기에는 매가 자주 도망간다고 여겼다. 수치들은 한식 즈음 매가 고향을 생각해 달아난다고 믿었다. 매가 죽으면 한지로 싸서 산에 묻는다. 매가 늙어 못 쓰게 되면 산에 데려가 풀어주는데, 대부분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매사냥은 남자들 사이에서 최고의 놀이로 여겨졌으며, "첫째가 매, 둘째가 말, 셋째가 첩"이라는 말도 있다. 매사냥은 해질 무렵, 바람 부는 날, 비 오는 날에는 하지 않는다. 이를 각각 ‘저녁 불가’, ‘바람 불가’, ‘비 불가’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