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 놀이 : 격구
격구는 공을 치는 유희의 일종으로, 일명 '타구(毬)'라고도 불린다. 이 놀이는 당나라 시대에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서역이나 티벳에서 유입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있다. 물론, 당나라 이전인 한나라 때에도 이미 중국 변방의 국가들에서 공을 치며 놀았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대체로 귀족들이 여가 시간에 즐겼던 유희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 현종은 말을 타고 격구를 즐기며 돌아다녔다고 전해진다. 당나라에서 유행한 격구는 고구려, 백제, 신라 등 가까운 이웃 나라로 전파되어 성행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지만, 이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그러나 당나라 초기부터 격구를 구경했다는 시가 많이 전해져 온다.
당에서 유행하던 타구는 이웃나라로 전파되었고, 특히 송나라 시기에 더욱 성행했다. 귀족들의 놀이였던 만큼,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고, 공을 쳐서 문을 통과시키는 놀이로 많은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귀족들의 놀이이기에, 공을 치는 사람보다는 시중드는 사람이 더 많았다고 전한다. 공봉관들이 화려한 비단옷을 입고 공을 던지거나, 맞고 안 맞고를 가려 심판을 해 주었으며, 교방악까지 동원되어 흥겨운 음악을 연주했다. 이렇게 호화로운 놀이가 진행되면, 왕을 중심으로 종친과 고관들이 모여 경기를 구경하고, 편을 들어가며 흥을 돋우기도 했다.
타구를 즐기려면 먼저 널찍한 구장을 마련하고, 공이 나갈 문을 만들어야 한다. 사람들이 모이면 왕은 이들을 접견하고, 경기 시작의 신호를 보낸다. 타구에 참가한 사람들의 성적에 따라 시상도 이루어지며, 놀이가 끝나면 왕은 모인 사람들에게 술과 밥을 내리는 것이 상례였다. 격구는 귀족적인 놀이였기에 막대한 비용이 들었고, 이에 대해 송나라의 주자(朱子)는 격구가 무용지물이라며 극구 반대하기도 했다.
고려는 당과 송, 원나라의 영향을 받아 격구하는 의식을 도입하고 여러 곳에 격구장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고려는 개국 초
기부터 궁궐 한쪽에 격구장을 마련했다고 전해진다. 게다가 고려시대에는 궁중에서 격구를 즐길 뿐만 아니라, 승려들을 불러 음식을 하사하고 신령에게 빌어 재앙을 막는 의식도 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격구장에서는 국가적인 행사도 함께 이루어지기도 했다.
『고려사』에 따르면, 예종 5년(1110) 왕이 중광전 남루에서 신기 군사들이 격구하는 모습을 사열하기도 했다고 한다. 동왕 11년에는 왕이 서경에 나아가 장원정 공사가 완공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때 서경의 유수 등 백관들은 의장을 갖추고 마천정에서 왕의 어가를 맞이하며, 대악과 관현 등 화려한 복장을 입고 나왔다. 이에 자극을 받아 부녀자들도 말을 타고 격구에 참가했다고 한다. 이때 여성들이 격구에 참가하는 모습을 본 왕은 부녀자들의 격구를 중지시키기로 했으나, 이후 인종 때부터는 여성들의 격구가 다시 부활했다고 한다. 의종 때에는 왕의 사치와 유흥이 절정에 달했으며, 왕은 격구에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고 한다. 왕은 격구를 잘하여 공을 힘차게 쳤고, 그 솜씨를 보고 사람들이 모두 감탄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격구에 대한 왕의 열정은 끝이 없었다. 왕은 종종 서루에서 격구를 구경하며, 때로는 직접 자신의 솜씨를 선보이기도 했다. 왕은 격구뿐만 아니라 모든 놀이에 재능이 뛰어나고, 궁중에서 벌어지는 무예 중심의 놀이를 즐겼다. 왕이 격구를 좋아하자, 신하들도 다투어 격구를 익혔고, 왕 주변에는 자연히 격구선수들이 모여들게 되었다.
원나라와 친교를 맺은 최이(崔怡)는 여러 채의 집을 헐어 구장을 만들었다. 구장이 조성된 후에는 민간인을 불러서 물을 뿌리게 하고, 도방의 마별초 수십 명을 모아 격구를 즐기게 했다. 이때 최이는 격구를 잘하는 사람을 선발해 벼슬과 상금을 주기도 했다. 격구는 하루가 아니라 며칠씩 지속되었으며, 참여자들은 몽고풍의 의복을 입고 화려하게 장식한 뒤, 기마와 승마도 함께 즐겼다. 이러한 놀이를 통해 몽고풍의 문화가 고려에 영향을 미쳤다.
고려 말기에 가까워지면서 격구는 점차 줄어들었고, 승마가 유행하였다. 우왕 때에는 왕이 여성들과 어울려 유약한 놀이에 빠졌지만, 무장들은 군사 훈련에 힘썼다. 이성계는 무인 출신으로, 격구와 함께 승마와 칼쓰기, 활쏘기 등의 무예에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조선왕조가 세워지면서, 격구는 거의 사라지고 말달리기가 성행했다. 고려 말의 격구는 여인들도 함께 즐겼기 때문에 풍기가 문란해졌다고 여겨졌고, 엄격한 유교윤리를 표방한 조선에서는 이를 방관할 수 없었다. 세종은 격구를 부흥시키기 위해 말타기와 격구를 결합하라고 지시했지만, 격구는 점차 사라졌고, 말달리기만 성행했다. 태조 이후에는 모화관에서 격구를 하였다는 기록만 남아 있으며, 인조 때에는 마술(馬術)이 주로 연습되었다. 마술은 말 위에서 여러 가지 재주를 부리는 놀이로, 일본과의 평화가 회복된 뒤에는 일본인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 마상재를 여러 차례 보내기도 했다.
이처럼 격구는 시간이 지나며 점차 사라졌지만, 아이들은 여전히 나무막대기로 나무로 만든 공을 치며 노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