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민속 문화

투전(鬪刑)

solid-info 2025. 4. 23. 18:13

투전(鬪刑)

 

 투전은 도박의 한 종류로, 남을 속여서 돈을 따내는 노름을 말한다. 조선 후기에는 투전이 널리 퍼져서 손을 대는 사람이 셀 수 없이 많았다고 한다. 돈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투전판을 돌아다니며 노름에 빠져 날뛰다가 결국 집안이 망하는 일이 흔하게 일어났고, 많은 가정이 비극을 겪었다. 투전을 잘하는 사람은 결국 남을 잘 속여 판돈을 싹 쓸어 가는 사람을 뜻했다. 『경도잡지』에서는 투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투전은 종이로 만든 카드 놀이의 일종이다. 투전장에는 사람, 물고기, 새, 꿩, 별, 말, 노루, 토끼 등 여덟 가지 종류가 있으며, 각각 1에서 9까지의 숫자가 있다. 사람 장수를 황제(황)라고 하고, 물고기 장수를 용(龍), 새 장수를 봉황(鳳), 꿩 장수를 매(鷹), 별 장수를 극(極), 말 장수를 승(乘), 노루 장수를 호랑이(虎), 토끼 장수를 취(取)라고 부른다. 모두 합쳐서 80장이 되며, 이를 ‘8월’이라고 했다. 사람, 물고기, 새, 꿩 종류는 ‘노(老)’를 사용하고, 별, 말, 노루, 토끼 종류는 ‘소(少)’를 사용한다. 투전에 쓰이는 글자는 전서체나 초서체처럼 보이는데, 요즘에는 너무 기괴하게 써서 무슨 글자인지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투전꾼들은 1에서 9까지의 글자 내용을 모두 외우고 있어서, 서로 돌아가면서 합이 9가 되도록 맞추어 나간다. 이렇게 9가 되게 맞추는 것을 '가보'라고 불렀다. 즉, '가보를 잡는다'면서 돈을 걸고 이긴 사람이 돈을 따내는 식으로 놀이가 이루어졌다.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이것은 옛날과 지금의 인물들을 등급 매겨 카드에 새긴 것으로, 모든 패를 합치면 120장이 된다. 이것을 투패(투전 카드)라 부른다. 하지만 120장을 모두 쓰지 않고 보통 40장이나 60장 정도를 한 번에 사용하여 놀았다. 몽고 사람들에게서 시작됐다는 설도 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숙종 때 당상통역관이었던 장현이 투전을 처음 시작했다고 한다. 장현은 희빈 장씨의 아버지 장형의 사촌동생이었다. 희빈 장씨는 경종의 어머니로, 왕후에 올라 한때 권세를 누렸다. 이들은 남인 세력에 속해 있었기에 정치적으로 노론을 눌렀고 남인이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남인의 힘이 꺾이자 노론이 다시 힘을 얻어 희빈 장씨가 쫓겨나고 왕비 자리가 민씨로 교체되는 등 궁중이 매우 혼란스러웠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장현도 결국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바로 이때 장현이 투전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장현은 한때 중추부사라는 높은 관직까지 지냈던 인물이었다. 그는 여러 차례 북경을 왕래하면서 여진족이나 몽고 사람들과 교류하며 많은 이익을 챙겼다. 외국어에도 능숙해서 궁중에서 통역을 맡았고, 북경의 정세에도 밝았다. 희빈 장씨의 도움으로 북경을 드나들면서 여러 가지 희귀한 물건들을 가져왔는데, 아마 이때 투전도 들여온 것으로 보인다.

 

 투전은 들어오자마자 전국으로 빠르게 퍼졌고, 심지어 아이들까지 투전에 미쳐 날뛰는 지경에 이르렀다. 투전장을 만들 때는 두꺼운 종이에 콩기름을 여러 번 먹여 종이를 단단하게 만든 후, 한쪽 면에 글자를 그려 넣었다. 투전장을 그리는 사람을 '타자'라고 불렀다. 여러 벌을 한 사람이 그리다 보니 글씨체가 비슷했고, 인쇄가 아닌 손글씨라 사람마다 글씨에 약간씩 차이가 있었다. 투전장은 한 손으로 잡고 한 장씩 뽑아내는데, 기름 덕분에 종이가 미끄럽게 빠져나왔다. 노름꾼이 투전장을 잡아당기는 모습이 엿을 늘리는 것과 비슷해서 투전장을 ‘엿방망이’라 부르기도 했고, 투전꾼을 ‘엿방망이꾼’이라 하기도 했다. 서로 눈치를 보며 천천히 뽑는 모습 때문에 ‘노름꾼이 엿방망이 죄듯 한다’는 속담도 생겨났다.

 

 노름꾼들은 무리를 지어 몰려다니며 몰래 투전판을 벌였다. 투전은 기술을 겨루는 것이 아니라 돈을 따내는 것이 목적이라, 투전판마다 웃고 우는 사람이 갈렸고 폭력도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라에서도 다른 놀이보다 투전을 더 엄격히 다스렸다.

 

 영조 초기에는 투전이 크게 번져, 서울은 물론 전국 구석구석까지 퍼졌다. 투전을 손대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고, 나라에서도 단속하려 했지만 막을 수가 없었다.

 

 헌종 때의 문인 이이교는 자신의 문집 『용국집』 권1 「거가잡희」에서 도박의 해로움을 이렇게 경계하고 있다. 그는 자를 우천, 호를 녹유라고 했는데, 전국적으로 퍼진 노름의 폐단을 개탄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 가지 잡기 놀이는 모두 사람의 마음을 잃게 한다. 그중에서도 도박은 도둑질보다 더 큰 해를 끼친다. 맹자도 도박을 불효 중에서 가장 큰 죄로 여겼다. 도주공(부호로 이름난 사람)도 저포놀이를 멀리했다. 지금은 목동들도 노름으로 시간을 보내지 않는 경우가 없을 지경이다. 옛 성현들은 이런 잡기를 엄하게 금지했다. 지금 골패, 업패, 투전 같은 것들이 가장 사람을 많이 속인다. 동동이노름, 가보잡기, 골패놀이 등이 전국적으로 번지고 있다. 이밖에도 각종 놀이가 사람을 속이는 데 쓰이고 있다. 점잖은 집안 자제들도 어릴 때는 총명하지만 이런 습관에 한번 젖으면 거의 빠져들지 않는 경우가 없다. 하층민들은 더 심해서 고치기가 어렵다. 한번 노름에 빠지면 밤낮으로 돌아다니며 생업을 버리고 떠도는 무리가 된다. 결국 천성을 잃고 부랑자가 되는데, 오히려 거리를 활보하며 그것을 멋이라고 여긴다. 도박으로 남을 속여 재산을 빼앗는 것을 기술로 여긴다. 심지어 선량한 친구까지 끌어들여 도박판을 휩쓸고, 결국 모두 패가망신하게 만든다. 노름밑천이 떨어지면 도둑질까지 하니, 어찌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이교는 이렇게 한탄을 금치 못했다. 이처럼 도박이 사회에 큰 폐해를 끼쳤지만 투전은 날로 번성해, 투전꾼들은 '투전의 국수'라는 말까지 하며 으스대기까지 했다. 세상 사람들은 이들을 ‘타자’라고 불렀다.

 

 정조 때 편찬된 『교거쇄편』에는 원인손을 ‘타자’라고 적고 있다. 그는 인조 때 공신 원두표의 5대손으로,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자는 자방이고 시호는 문민공이다. 영조 29년에 과거에 급제해 우의정까지 오른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소년 시절에 노름에 빠져 ‘국수’라고 불릴 정도였다. 그의 아버지 원경하(이조판서)는 이에 크게 노했지만, 아들의 재주를 알아보기로 했다. 그래서 투전장에서 사람 패(인장)를 한 장 숨긴 뒤 아들에게 이를 찾아보라고 했다. "사람 패를 뽑지 못하면 매질하겠다"고도 말했다. 원인손은 투전장을 이리저리 만져보더니 그 속에 사람 패가 없는 것을 알아내고 "여기에는 사람 패가 없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아버지는 탄식하며 "어릴 때부터 노름에 능숙하더니 이제 완전히 통달했구나. 이제 네 재주를 탓하지 않겠다.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이후 원인손은 노름을 끊고 학문에 힘써 재상까지 올랐다. 투전판에서 인생을 망칠 뻔한 사람도 마음을 고쳐먹으면 올바르게 살 수 있다는 좋은 일화이다.

 

 초상이 났을 때 밤을 새워 노름하는 풍습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았다. 점잖은 사람들도 초상집에서는 버젓이 투전판을 벌여 밤새도록 놀았다. 옛날에도 상가에서의 투전판은 대체로 눈감아 주었는데, 이를 틈타 생판 모르는 초상집에 문상객으로 가장하고 들어가 투전판을 여는 투전꾼들도 있었다.

 

 영조와 정조 이후 사회 분위기를 바로잡기 위해 잡기와 도박을 금지하고 걸린 사람을 엄하게 다스리기도 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훗날 일본이 나라를 빼앗은 뒤에는 노름꾼들을 정당한 직업에 종사시키려 엄하게 다스렸고, 걸리면 머리를 삭발시키기도 했다. 이런 조치로 노름을 끊은 사람도 더러 있었지만, 결국 도박 자체를 뿌리 뽑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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