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예절에 속하는 행사 가운데 하나로, 주인과 손님이 잔치를 벌여 술을 마신 뒤에 서로 재능과 기예를 뽐내는 놀이를 투호라 한다. 이 놀이는 중국 한나라 때부터 이미 시작된 것으로 전해진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화살을 병 속에 던져 넣는 놀이로, 정해진 예절에 따라 진행한다. 주인이 먼저 투호에 필요한 기구를 들고 나오면, 시중을 드는 사람이 화살을 넣을 병과 중이라는 계산기구를 가지고 나온다. 주인은 투호에 필요한 기구를 모두 준비한 뒤 "화살과 병으로 손님을 즐겁게 하고자 하오니 함께 즐기십시다"라고 권한다. 이에 손님은 좋은 술과 안주를 이미 대접받았기 때문에 사양하는 척하며 겸손한 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주인이 거듭 권하면 손님은 마침내 자리에 올라 살을 던지기 시작하며, 여러 가지 절차에 맞추어 술잔을 주고받기도 하고 때로는 북을 치면서 즐겁게 논다.
이와 같이 투호는 당나라 시기부터 의식적으로 손님을 접대하는 방법으로 자리잡았다. 이후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 초기까지도 예절에 따라 투호가 이어졌다.
조선 세조 6년(1461) 3월, 명나라에서 온 사신 장(張)과 무충(忠)이 투호를 할 줄 안다고 하여 놀이를 청하자, 왕은 이를 받아들여 영접을 담당하는 관리에게 청동으로 만든 투호병 2개와 화살 48개를 보내도록 하여, 명나라 사신과 우리나라 관리들이 함께 모여 하루 동안 즐겁게 지내게 하였다. 이 무렵부터 투호가 궁궐과 주변에서 널리 퍼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는 "겨울에는 격구를 즐기고, 여름에는 투호를 하며, 봄과 가을에는 활쏘기를 즐긴다"고 했던 기록도 있어, 궁궐을 중심으로 격구 · 투호 · 활쏘기가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성종 9년(1478)에 왕이 투호 의식을 왜 하지 않는지를 묻자, 신하들은 송나라 사람 사마광이 쓴 『투호보』라는 책에 "예전에는 많은 사람이 투호를 했지만, 요즘은 그 방법을 몰라서 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보고하였다. 이를 보면 투호가 한동안 뜸해졌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왕은 투호는 나쁜 놀이가 아니니 나이 든 재상들과 상의하여 다시 행하도록 하라고 지시하였다. 이후에도 투호는 궁중에서 어느 정도 이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성종 때는 세상이 평화로워서 궁궐 안팎에서 크고 작은 잔치가 자주 열렸는데, 이때마다 투호를 비롯해 여러 가지 놀이가 유행했다.
중종 13년(1518) 4월에는 왕자가 환관과 함께 투호를 하고, 왕이 이들에게 상품까지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조정의 고관들은 왕에게 왕자가 환관들과 어울려 투호를 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고 상소하였다. 그러나 왕은 투호는 예절에 맞는 기예이기 때문에 왕자가 혼자서 할 수 없어 환관과 함께 놀 수밖에 없다고 하며 계속하도록 허락하였다. 이때 시강관 김정국은 "환관과 손님이 함께하는 일은 드물지만 있을 수 있으나, 왕자가 환관과 짝을 이루어 투호를 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고 하며 반대하였다. 참찬관 문근도 "궁궐 안에서 환관이 투호를 한 것은 궁중 사람들이 다 아는 일인데도, 정원이 이를 몰랐다고 하니 궁중의 일을 숨기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비판하였다. 이 기록들을 보면, 당시 궁궐에서는 환관과 왕자가 함께 투호를 하며 즐겼음을 알 수 있다.
명종 15년(1560) 4월에는 왕이 경회루에서 왕족들과 의빈들을 불러 함께 모임을 갖고 강경, 제술, 투호를 하며 상품을 하사한 일이 있었다. 왕은 이 밖에도 경회루에서 궁중 여악을 부르게 하고, 활쏘기를 하며, 기녀들의 춤을 감상하는 등 흥겹게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왕이 유흥을 즐길 때마다 유학자들은 이를 강하게 비판하여 못하게 하였다. 유학자들의 간섭이 심해지자 명종 이후에는 궁중 오락이 점차 사라지고, 궁궐 분위기는 점점 썰렁해졌다.
조선 후기에도 투호의 절차는 조금씩 바뀌어, 박태보가 투호 절차를 새롭게 정리하였다. 이때 투호 병의 크기는 높이 7치, 몸통 둘레 5치, 입구 지름은 2치 반, 안에 팥을 채워 넣어야 했다. 화살은 뽕나무로 만들되 껍질을 벗기지 않고 그대로 두었고, 화살을 던지는 거리는 앉은 자리에서 화살 두 개 반 정도 떨어진 곳으로 정했다. 이러한 기준은 『예기』에 나오는 투호 규정에 따른 것이다. 투호놀이에서 이긴 사람은 진 사람에게 술을 주었고, 술은 미리 준비해두었다. 여러 사람이 같은 방향으로 화살을 던졌기 때문에 화살이 튀어나가는 일도 있었는데, 이런 것도 모두 계산에 포함하였다. 투호는 어디까지나 좌중의 흥을 돋우기 위한 놀이였기 때문에 승패를 심각하게 따지지 않았다. 음악을 연주하고 대화를 나누며 손님들을 즐겁게 하려는 것이 목적이었고, 도박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놀이였다.
조선 후기에도 때때로 궁중에서는 원로나 왕족 가운데 덕망 있는 사람을 초청해 투호를 하게 했으나, 기록으로는 자세히 남아 있지 않다. 세상이 점점 가벼워진다고 본 왕실은 궁중에서 투호를 권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우아한 놀이도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다만 『공사견문록』에 따르면, 현종 7년(1666)에 현종은 할머니인 장렬왕후가 병이 낫자 그녀를 모시고 후원으로 나들이를 갔다. 이때 공주와 왕자들도 함께 모여 투호를 즐겼다. 투호를 잘한 왕자에게는 말을 하사하고, 차점자에게는 적당한 상품을 주었으며, 가장 성적이 나쁜 왕자에게는 말 안장을 빼고 말 앞에서 큰 소리로 불리게 하여 벌을 주었다. 이를 통해 비록 일반적으로 투호가 중단되었지만, 특별한 경사나 기념일에는 궁중에서 왕족과 종친들이 모여 투호를 하며 친목을 다졌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은 투호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아 점차 사라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