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민속 문화

민속 가구 소개 (궤와 옷장)

solid-info 2025. 4. 3. 20:28

민속 가구 소개 : 궤와 옷장

 

1. 궤

 나무로 만든 직사각형 상자를 말한다. '장기(臟器)를 세운다'는 뜻에서 '수궤(竪櫃)'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그에 대응하여 눕혀놓은 궤라는 뜻으로 '와궤(臥櫃)'라고도 한다. 궤에는 윗다지와 반다지(앞다지)의 두 가지 형태가 있다.

 

 윗판(천판)을 앞뒤로 잘라서 앞쪽을 문으로 삼은 것은 윗쪽에 문이 있다 하여 '윗다지'라 하고, 앞면을 위아래로 둘로 나눠 윗부분을 문으로 삼은 것은 '반다지' 또는 '앞다지'라 한다. 사람들이 흔히 '돈궤'라 부르는 대형 윗다지는 실제로는 잘못된 이름이다. 돈궤는 겉모습은 윗다지와 같지만 크기가 훨씬 작고, 윗판의 잘린 부분 가운데에 엽전이 들어갈 수 있도록 길쭉한 작은 구멍이 뚫려 있다. 윗다지는 책이나 문서, 옷, 천, 말린 식재료, 그릇, 제사에 쓰는 그릇, 금속 활자 등 다양한 물건을 보관하는 다용도 가구이다. 보관하는 물건의 종류에 따라 사랑방, 다락, 창고, 사당 등에 놓고 사용하였으며, 관청에서도 널리 썼다.

 

 궤는 문(뚜껑)이 널빤지로 되어 있어서 테두리가 높지 않고, 문짝에 붙은 경첩이 윗판과 연결되어 있어 위에 다른 궤를 포개어 놓을 수는 없다. 큰 궤 중에는 문짝의 가운데에 경첩 없이 앞으로 당겨 여는 작은 문을 만들어 위에 또 다른 궤를 얹을 수 있도록 만든 것도 있다. 이런 경우 위에 올리는 궤는 보통 낮은 다리를 달고 있다.

 

반다지(앞다지)는 주로 안방에 두고 사용하였으며, 윗판 위에는 이불을 얹었다. 장롱 같은 가구를 마련하지 못한 서민 가정에서는 이 반다지가 꼭 필요한 가구였으며, 서민 여성의 기본 혼수품이었다. 반다지 중에는 특이한 형태도 있는데, 안쪽을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누고 문짝을 두 개 나란히 단 것을 '원앙반다지'라 하며, 가운데에 작게 문을 낸 것을 '개구멍 반다지'라 한다. 원앙반다지는 부부가 오랫동안 함께 잘 살라는 의미로 만들어지는 결혼 예물이며, 부유한 집에서는 부부의 수의를 넣기 위해 만들기도 한다. 개구멍 반다지는 옷을 많이 넣기 위해 특별히 고안된 방식으로 보인다.

 

궤는 튼튼하고 물건 보관에 안전해서 거의 모든 집에서 여러 개씩 두었으며, 사용 목적이 다양하여 지역마다 특색을 띠기도 한다. 필요에 따라 주문 제작된 궤는 일정한 형식에서 벗어나 다양한 형태를 보여준다. 예를 들어, 책상을 겸한 반다지나 장롱의 형태와 결합된 반다지장처럼 다른 가구 형태와 섞인 독특한 모습도 보인다. 궤는 상품 포장과 운반 용도로도 사용되었는데, 일제 강점기 초기에 성냥을 큰 나무궤에 담아 소매상들이 팔았다. 성냥을 다 판 뒤 남은 빈 궤는 서민들이 얻어다 색종이를 붙여 혼수품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북쪽 지방의 궤는 남쪽 지방의 궤보다 높이가 더 높으며, 황해도와 충청도 등 서쪽 지역의 궤는 금속 장식이 화려하고 많이 붙어 있다. 지역별 특징이 가장 뚜렷한 반다지로는 강화와 박천 지방의 것이 있다. 강화반다지는 주로 소나무로 만들며, 폭에 비해 높이가 높다. 무쇠 장식에는 '만(卍)'자나 '아(亞)'자 모양을 뚫어내어 장식을 돋보이게 하고, 가운데 절개된 부분에는 표주박 모양의 경첩을 달며, 그 양옆에는 네모난 경첩을 붙인다. 표주박 모양 경첩 아래에는 '배꼽장식'이 있으며, 자물쇠를 여닫을 때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자물쇠 주변에 넓은 머리를 가진 못을 박는다. 대부분의 반다지는 낙목이라는 보강재가 윗판에 붙어 있어 문짝 위까지 ㄱ자 모양으로 꺾여 있으므로, 윗판 위에 물건을 올려두면 문 여닫기가 불편하다. 하지만 강화반다지는 낙목이 윗판의 앞머리에만 달려 있어 물건을 올려놓아도 문을 여닫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설계되었다. 박천반다지는 '숭숭이 반다지'라고도 불리는 무쇠 장식 반다지이다. 이 반다지는 피나무로 만들며, 특별한 나뭇결이 없는 재질에 금속 장식을 가득 붙여서 꾸민 것이다.

 

궤의 기원에 대해서는 중국 기록에 따르면, 하나라는 나라와 주나라라는 두 설이 전해진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제4대 탈해왕(재위 57~80)이 길이 20척, 너비 13척의 궤에서 나왔다는 기록이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것이다.

 

 

2. 옷장

 의류를 보관하는 가구로서 중상류 이상의 가정 내방가구를 대표한다. 머릿장(단층장) · 이층장 · 삼층장 · 의거리장, 드물게는 사층장 · 오층장도 있다. 크기에 따라 작은 장은 애기장이라고도 부르며, 형태에 따라 원앙장, 경첩 모양에 따라 나비장 · 불로초장 등의 이름으로도 불린다. 겉모습은 충롱(층층이 쌓는 광주리)과 비슷하지만 장은 각 층의 몸체가 하나로 되어 있으며, 대부분 서랍이 있는 반면 농은 몸체가 분리되고 대부분 서랍이 없다.

 

 한복은 평평하게 재단되어 접어 보관해도 그 형태가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옷장에는 많은 양의 옷을 접어 넣을 수 있었다. 남성들의 예복은 귀하게 여겨 별도의 예복함에 따로 보관하였다.

 

 장은 우리 고유의 말이며, 한자로는 '세로로 세우는 궤'라는 뜻의 수케(竪櫃)라고 하였다. 조선시대 중기 이전에는 이층 또는 삼층의 장은 없었다. 옷은 유상(버들로 엮은 상자)과 소상(짚을 엮고 색을 입히지 않은 상자) 또는 궤에 보관하였으며, 방 한쪽에 나무로 된 횃대에 걸쳐두었다. 수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장은 궤에서 발전된 것이다. 즉 장은 처음 궤에서 형태가 변하여 단층장인 머릿장이 되었고, 이것이 다시 2층이나 3층으로 변화된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는 장의 발생이나 기원에 관한 문헌 기록은 없으나, 우리 장과 비슷한 형태의 중국 서궤가 명나라 시대 무덤에서 출토된 바 있다. 신라시대 가구 중 현존하는 목재 가구는 없지만, 『삼국사기』에는 목재를 제작하던 관청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며, 안압지에서 출토된 나무 심에 옻칠을 한 기물이나, 꽃 모양으로 장식된 옻칠 장식 부재 등에 나타난 나무를 다루는 기술, 경주 황룡사 9층 목탑의 사리함 내부의 문 양식 등을 통해 보아 정창원 소장의 가구와 같은 단층장 양식이 신라 궁중에서 사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시대의 문헌인 『고려사』나 『고려도경』에는 장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제작된 나전경함(조개껍질을 붙여 꾸민 경전함) 등을 보면, 우수한 나무 가구를 제작할 수 있는 능력은 충분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문신 어득강(1470~1550)이 쓴 '기물명 20수'에는 관(관모) · 대(띠) · 이(신발) · 침(베개) · 금(이불) · 장(장막) · 사(통) · 이(주다의 뜻) · 정(솥) · 경(거울) · 즐(빗) · 척(자) · 인(도장) · 표(바가지) · 금(거문고) · 궤(궤짝) · 탑(탑) · 검(칼) · 병(병풍) 등의 기물만 있을 뿐, 장이나 장의 한자어인 수(竪)라는 용어는 보이지 않는다.

 

 단층장인 머릿장은 세로 기둥과 가로 나무틀에 의해 나뉘어 머름칸 · 쥐벽간(좁은 칸) · 문짝 · 서랍 등으로 이루어진다. 단층이므로 비교적 낮아 이불 · 요 · 베개를 얹거나 바느질 그릇을 얹어두기도 한다. 2층 또는 3층 장은 이 단층장을 위로 2~3번 반복 구성한 형태로, 이들이 보여주는 나뭇결 무늬는 세련된 조화와 다채로운 아름다움을 지닌다. 머릿장과 함께 이층 또는 삼층장은 옷을 넣는 대표적인 내방가구로서 주로 안방에 둔다. 이러한 양식의 가구는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그 예를 찾을 수 없다. 안방용 장의 다리는 층수에 관계없이 낮고 굽은 형태(앙가마제)를 하여 안정감을 준다.

 

 이불장은 이름은 장이지만 실제로는 장이 설치되지 않으며, 세로 기둥과 가로 틀로 좁은 칸과 서랍만 만들거나 작은 장을 붙이는 것이 보통이다. 이불장은 윗면에 이불을 개어 얹어두는 용도로 쓰이므로, 기둥과 가로 틀의 굵기가 가구 크기에 비해 두껍다. 이불장은 자녀들의 방에 둔다.

 

 의거리 장은 조선시대 말기에 나타난 형태로, 하단에는 낮은 장이나 반다지가 있고, 그 위에 긴 장이 얹혀진 2층 구조의 장이다. 위쪽 내부에는 횃대가 있어 옷을 걸 수 있게 되어 있다. 문짝에는 처음에는 작은 유리를 붙이다가 1척 반짜리 유리, 그 다음은 2척짜리 유리로 점차 커졌고, 3척짜리 거울이 붙은 의거리는 1930년대 이후에 제작된 최신형이다. 유리나 거울이 붙은 의거리는 대부분 하단에 반다지가 있으며, 이런 의거리는 안방용이다. 사랑방에서는 오동나무로 만든 의거리를 사용하였다. 사랑방용 의거리에는 대부분 '불에 달군 인두로 무늬를 새기는 방법(낙동법)'으로 무늬를 살리거나 시문을 음각하였다.

 

 금침장은 의거리 장과 형태는 비슷하나 내부에 횃대가 없으며, 일반 장에 비해 폭이 약간 넓다. 하단에는 대부분 반다지가 붙어 있다.

 

 또한 골조를 나무로 만들고 좌우와 뒷판에는 가는 나무살을 대어 튼튼하게 하며, 겉과 속에는 고급종이를 바른 고급 지장(종이장)도 있다. 이러한 지장은 궁중이나 부유층이 특별한 취미로 만든 것이다. 모든 장의 내부에는 종이를 발랐다. 고급품은 당지(중국제 종이)를, 일반 장에는 푸른 물을 들인 종이를, 조선 말기에는 황지(누런 종이)를, 일제강점기에는 노루지(질긴 종이)를 발랐다.

 

 버선장은 몸체가 매우 작은 여성용 장으로, 구조는 큰 장과 같다. 단층에서 3~4층짜리까지 있으며 애기장이라고도 부르며 넉넉한 집안에서 사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