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각게수리
각게수리는 여닫이문 안에 여러 개의 서랍이 설치된 일종의 금고로서, 귀중한 물건이나 문서를 보관하는 데 사용하였으며 약장으로도 쓰였다. 『조선왕조실록』 숙종 37년(1711) 8월 5일 기록에 따르면, 조이중이 통제사로 있을 당시 각기소리 8개를 만들어 그 안에 귀한 물건을 넣어 신에게 보낸 일이 문제가 되었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숙종 시대에 이미 각기소리를 사용했음을 보여준다.
각게수리는 『증보산림경제』의 살림살이 관련 기록인 ‘가정편’에서는 일본의 ‘왜궤’를 ‘갓게슈리’로, 같은 책의 ‘잡방’에서는 역시 왜궤를 ‘갸계소리’로 표기하고 있다. 헌종 때 기록된 『재물보』에서는 중국의 소형장을 ‘각비슈리’라고 하였고, 영조 51년(1775)에 간행된 『역어유해보』에서는 천안주를 ‘각기소리’라고 하였는데, 이처럼 표기 방식은 시대와 문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중국 명나라 시대의 학자이며 장식 예술가인 이어(李漁, 1611~1680)는 그의 저서 『입옹우집』 권4에서 백안이라는 장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는 의사에게 약 이름이 적힌 장이 없었다면 약재를 하나하나 살펴야 하므로 아무리 명의라도 치료가 어려웠을 것이라 하였다. 이러한 장은 의사뿐 아니라 귀족이나 학자들도 금은보화나 글을 쓰는 데 필요한 자료를 정리하고 보관하는 데 사용하였다. 특히 층을 나누고 칸을 나누어 만든 백안은 학자들이 자료를 체계적으로 보관하여 글쓰기나 책 저술에 활용하는 데 적합하였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각게수리 중에는 안쪽 서랍에 약재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이 있으며, 이는 주로 가정에서 상비약 보관용으로 사용한 것이다. 또한 내부에 여러 개의 서랍이 있는 것은 귀중품 보관용으로 사용되었다.
천안주와 백안주의 차이는 본래 백안주로 불리던 것이 시간이 흐르며 중국 특유의 과장 표현 방식에 따라 ‘천 개의 눈’이라는 뜻의 천안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증보산림경제』 ‘잡방’의 청재(깨끗한 방) 위치에 놓는 일본식 궤에 대해 “검은 철로 장식한 것은 매우 뛰어나니 반드시 하나쯤은 놓을 만하다”고 극찬한 바 있다. 『임원경제지』의 문구갑(기물 목록서)에서도 『증보산림경제』의 왜궤 관련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으며, 출처를 명확히 밝히고 있다.
일본의 현연(벼루 상자)은 원래 밑에는 종이를, 위에는 벼루를 넣는 두 개의 상자를 포개놓은 문방용 가구이다. 17세기 무렵 상업이 발달하면서 중인층 사이에서 널리 쓰이기 시작하였다.
각게수리는 안방과 사랑방 모두에서 사용된 귀중한 가구 중 하나이다.
2. 농(籠)
장과 함께 내실용 가구를 대표하는 것이 농이다. 농은 위짝과 아래짝이 분리되기 때문에, 분리되지 않는 장과는 구별된다. ‘농’이라는 말은 본래 한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대나무나 버들로 엮어 만든 상자를 뜻하는 말이었다. 이처럼 대나무나 버들로 만든 기물 가운데 밑짝이 얕은 것은 ‘상’이라 부르며, 밑짝이 뚜껑보다 깊은 것을 ‘농’이라 하여 구분한다. 뚜껑은 위에 있으며, 시렁 위에 올려놓거나 같은 크기의 것을 두세 개 겹쳐 쌓아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이렇게 겹쳐 놓고 사용할 경우, 열고 닫기가 불편하였는데, 만주 지역 사람들이 농의 앞면에 문을 달아 열고 닫기 편하도록 했다는 『임원경제지』의 기록으로 보아, 1800년대를 전후하여 나무로 네 기둥을 세우고 판자를 댄, 개방된 형태의 수장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짐작된다.
농은 놓는 형태에 따라 수장농, 개판농이라 부르며, 사용된 재료에 따라 먹감나무농, 자개농, 삿자리농 등으로 나뉜다. 수장농은 나무 기둥 사이에 가로막이나 서랍이 없이 판재만으로 이루어진 목재 농의 기본형이다. 개판농은 대한제국 시기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전통 가구로, 윗판이 튀어나와 있는 형태에서 이름이 붙었다. 삿자리농은 나무 또는 대나무로 뼈대를 만들고, 대나무를 삿자리처럼 엮어 만든 농을 말한다. 이 밖에 같은 크기의 함을 두 개 포개 놓은 형태를 ‘함농’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3. 함(函)
함은 깊은 밑짝에 높이가 낮은 뚜껑을 경첩으로 연결하여 여닫을 수 있도록 만든 상자이다. 귀중한 물건을 넣는 용도로 사용되었으며, 자물쇠로 잠글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자물쇠는 뚜껑에 부착된 긴 뻗침대(길채 또는 낙목이라고도 한다)의 중간에 달린 고리(길목)와 함 몸체에 고정된 두 개의 고리(배목)를 연결하여 잠그는 방식이다. 함의 양 옆에는 들쇠가 달려 있어 옮기기에 편리하게 되어 있다. 오늘날에도 혼인할 때 신랑집에서 혼서지나 비단 등을 넣어 신부 집으로 보낼 때 함을 사용한다.
함이 처음 사용되기 시작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중국에는 ‘함’이라는 이름조차 없고 고려시대에 이르러서야 그 사용 기록이 나타난다. 『삼국유사』 권3 「탑과 사리」 편에는 사리를 담은 수정함, 침향함, 순금함, 은함, 유리함, 나전함 등과 불경을 담은 함이 등장한다. 『청장관전서』에는 고려 예종 2년(1107)에 하음 봉씨 가문에서 나왔다는 석함에 대한 기록이 있으며, 『고려사』에는 의례에 사용된 조함(임금의 명령을 담는 함), 책함(임금의 칙명을 담는 함), 표함(임금께 올리는 글을 담는 함) 등의 기록이 남아 있다.
고려 원종 13년(1272)에는 원나라 황후가 불경을 담기 위한 함을 요청하여 ‘전함조성도감’이라는 제작 기관이 설치되었고, 실제로 많은 수의 함이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전하는 여덟 개의 나전경함은 이 기관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시대의 나전경함은 조선시대의 나무로 만든 함과 양식상 유사하지만, 형태에서 차이가 있다. 뚜껑의 네 모서리를 윗판에서부터 비스듬하게 깎아낸 점이 그것이다. 이러한 모서리 깎음은 고려시대의 청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반면,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비스듬히 깎는 양식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고려시대 나전경함의 뻗침대는 길목만 달린 짧은 형태였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이 뻗침대는 ‘길채’ 또는 ‘낙목’이라 불리는 긴 형태로 바뀌고, 그 중간에 길목을 달아 잠그는 구조로 발전하였다. 또한 함은 윗판에 경첩이나 장식이 없는 경우가 많아 두 개를 포개어 쌓아두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런 형태에서 ‘함농’이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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